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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앙은행 독립, 누구로부터?
등록일 2014-07-14 17:22:46 작성자 송종운 / 회원(경제학 박사)
조회수 4241 연락처 02-722-3229 
중앙은행 독립, 누구로부터?
송종운 고려대 경제학
 




한국은행은 1950년 6월 설립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해방 이후 북쪽에서 중앙은행이 먼저 설립되는데, 1946년 소련 점령군에 의해 설립된 조선중앙은행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남쪽 경제를 혼란에 빠트리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정부는 급하게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이하, 연준)”에 중앙은행설립 게 관한 지원 요청을 하게 되고,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블름필드 박사와 젠슨이 파견되어 약 5개월에 걸친 한국은행법 개혁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마련했다. 이를 기초로 한국은행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설립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행의 설립의 모델은 미국 연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미 연준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획기적인 제도적 변화를 겪는다. 1951년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로 한 미 정부가 국채 발행을 결정하고 연준에게 사줄 것을 요청한다. 기존의 관행대로 정부의 국채매입을 별 잡음 없이 해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연준 측에서 거절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백악관 뿐만 아니라 재무부 역시 놀랐다. 그리고 바로 백악관에서 대통령은 재무부, 연준이사회 그리고 뉴욕 연준은행 최고 책임자를 불러 원만한 타협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결실도 보지 못하고 모임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그 명한 '951년 재무부-연준 합의'를 도출한다. 이 사건은 중앙은행의 역사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으로 평가되며, 뜻 깊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사건 깊숙이 들어가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합의 이후 연준 의장이 교체되는데, 국채 매입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던 당시 재무부 측 협상 대표였던 마틴이 연준 의장이 된 것이다. 기이한 일이다. 중앙은행 독립이라고 평가받는 에피스드에서 합의 결과 협상 상대측이 연준 의장으로 온 것이다. 또 하나, 이 합의는 미 정부의 매입 요청을 연준이 거절하거나 미루는 것이 아니라 요청대로 매입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점이고, 이를 자신의 주요 책무로서 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언뜻 이해가지 않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앙은행의 독립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로부터 독립이 아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 내에서 독립인 것이다. 즉, 미 정부의 요청대로 국채를 매입하기는 하되, 국채금리는 시장 상황을 고려하고 연준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독립은 중앙은행 운용상 독립이지, 선출된 권력으로서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하는 행정부와 완전히 결별한다는 의미에서의 독립은 아닌 것이다.


[발표문] 연준은 누구의 통제를 받아야 하나?
 
1) 한국은행(이하, 한은)에 대한 기존 논의 프레임을 변화 시킬 필요가 있음

- 기존 프레임: 관치 vs 시장 자율성
 
2) 대안 프레임 : 선출된 권력이 한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이를 이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함.
- 한국은행의 문제는 ‘선출된 권력(elected power)’이 통제할 것인가 아니면 ‘선택된 권력(selected power)’이 통제할 것인가로 되어야 함.
- 선출된 권력으로서 국회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들의 계층적, 직업별, 직능별, 세대별, 지역별 정치 의사를 대변하는 민의의 권력 기관임.
- 따라서 국회가 건전한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개입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온당하며 매우 자연스러운 정치적 행위임.
- 결국,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국회가 개입하는 것은 관치로 치부될 수 없음. 관치는 행정부의 지나친 정치적 간섭으로 한정하여 사용될 필요가 있음.
- 그동안 국회는 국민들의 편에서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수행에 개입할 수 있는 적절한 정치적 제도적 수단을 갖지 못하였음.
 
3) 미 연방준비제도(The Feral Reserve System)의 사례
- 한국은행의 설립은 우리정부의 요청에 의해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파견된 A. I 블룸필드와 j. P. 젠슨이 1949년 9월부터 약 5개월간 작업한 보고서를 기초로 한국은행법이 마련되어 1950년 6월 설립되었음.
- 따라서 한국은행의 설립은 미국 연준의 연구와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음.
- 그러나 미국 연준은 1946년 고용법, 1949년 더글라스 청문회, 1951년 재무부-연준 합의, 1953년 단기국채매입주의 그리고 1978 험프리-호킨슨법 등을 통해 연준의 통화신용정책의 수립 및 수행 그리고 운용체계를 근대화시켜 나갔음.
- 위에서 열거한 사건들은 연준이 통화신용정책 수립 및 수행에 있어서 그리고 운용에 있어서 의회로부터 어떤 책무를 부여 받았으며, 또한 동시에 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즉 연준과 선출된 권력으로서 의회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임.
- 이러한 맥락에서 연준 발전의 역사는 의회의 발전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음.
- 이를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음.
- 즉 한국은행 설립에 미국 연준이 핵심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이후 미 의회가 자국 국민들의 다양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연준의 통화신용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연준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는 고려되지 않았음.
- 이는 우리 국회가 다양한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임.
- 다시 강조하지만, 미 의회는 이미 1946년 고용법, 1949년 더글라스 청문회에서 부터 연준이 ‘고용의 극대화’, 즉 완전고용을 자신의 주요한 책무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였음.
- 연준은 의회로부터 물가안정과 고용 극대화라는 두 책무(dual mandate)를 위임은 기관임.
- 1978 험프리-호킨슨법은 연준이 정기적으로 의회에 통화신용정책에 대해 보고하게끔 법으로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업률 하안선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였음.
- 벤 버냉키 전 연준의장과 자넷 엘런 의장이 의화와 언론에서, 양적완화정책의 축소 기준을 실업률 6.5%로 삼고 있다는 발언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이 발언들이 바로 연준의 책무가 의회로부터 위임 받은 것임을 말해주는 것임.
- 엘런 의장의 오디세우스 방식의 포워드 가이던스는 고용을 극대화하려는 실업률 강조가 시장과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에 빈번히 노출되는 경험이 있음. 


* 2014년 7월 회원소모임에서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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